공지사항

가이사랴( Caesar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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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리적 위치

가이사랴는 텔아비브와 하이파의 중간지점 지중해변에 위치해 있는 고대도시이다. 가이사랴는 옛 시돈의 왕이었던 '스트라토' 라는 사람이 만든 작은 마을로, '스트라토의 탑' 혹은 '스트라토의 망대' 라고 불렸다. 그 후, 헤롯 1세가 이곳에 인위적으로 큰 항구를 만들고, 그 이름을 로마 황제의 칭호(가이사)를 따서 '가이사랴'라 칭했다.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의도적으로 항구의 규모를 아테네의 피레쿰 항구보다 더 크게 만들었다. 깊이가 약 37미터에 달하는 앞바다를 돌로 매워, 바다에 너비 60미터가 넘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아름다운 항구를 만들었다. 이 항구 위에 성벽, 탑, 망대들을 세워 국제 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가이사랴는 당시 이집트의 알텍산드리아, 시리아의 안디옥과 함께 지중해의 3대 항구로 이름을 얻었다.

2. 역사와 유적

헤롯이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 탄생시킨 도시로서 가이사랴를 만들고 도시화 한 헤롯 1세가 아기 예수를 찾아서 죽이려고 했던 헤롯 왕이다. 그는 원래 이두메인으로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다. 유대에 귀화하여 유대인이 되었으나, 정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늘 유대의 귀족들과 종교인들, 특별히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에게 강한 비난을 받았다. 헤롯 1세는 BC 37년부터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그에게는 해결해야 할 큰 과제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외적으로 로마 황제와 황족들, 그리고 로마 원로인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내적으로 정통성을 문제삼으며 왕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유대 종교인들과 제사장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헤롯은 한때 로마에 망명하여 사는 동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유대의 왕으로 인정받았으나 황제의 마음까지는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황제의 마음을 사기 위해 한때 자신을 지지하며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유대 땅의 옛 추종자들을 반역자들로 몰아 몰살시켰다. 그리고 황제의 이름을 딴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만들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고, 동시에 자신의 왕권이 견고함을 과시하게 된다. 그리고 가이사랴를 로마처럼 꾸며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로마 시민들에게 로마의 신전을 드나들고 로마의 문화와 향락을 즐길 수 있게 해줌으로써 이스라엘에 있던 로마 귀족들의 지지도 얻었다. 헤롯은 가이사라를 건설함으로써 당시 욥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이스라엘의 해상 무역을 가이사랴 지방으로 넓혔다. 무역으로 사마리아 지방의 질 좋은 열매들을 수출하고, 로마에 국제무역의 길을 열어 주어 당시 어렵던 로마 경제에 활로를 제공해 로마 황제의 골치 아픈 숙제를 덜어 주었다. 또한, 당시 지중해 최고 상권 중 하나였던 이집트로 가는 길에 이스라엘에는 폭풍이나 기상이변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는데, 가이사랴가 페니키아 지역에서 이집트로 가는 모든 해상 무역상들에게 여관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어 가이사랴는 국제항구로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

헤롯 왕은 전차 경기장에서 5년마다 전차 경주, 죄수와 맹수와의 결투, 노예들의 죽음의 검투 경기 등을 열었다. 로마 사람들이 원형경기장에서 열광했던 것 같이 가이사랴에서도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이다. 가이사랴의 화려한 모습 속에서 수많은 노예, 잡혀온 유대인들이 피 흘리며 죽어 나갔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 박해 시대에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잡혀 가이사랴의 전차 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 역시 로마와 발맞추어 같은 죄악을 저질렀던 것이다.

로마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유대인들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은 일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 머물다가 잡혀 박해를 받았다. 특별히 가이사랴 지방은 빌립과 바울 같은 분들을 통해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었기에, 구원받은 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사적으로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진 로마의 귀족들도 상당 수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헤롯은 또 하나의 숙제인 정통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옛 성전 터 위에 화려한 성전 재건을 명한다. 성전이 지어지는 동안에도 성전 터 옆에 임시 처소를 만들어 속죄제사를 드리고 유월절 등의 절기를 지킬 수 있게 해준다. 그 일로 제사장들과 율법사들, 그리고 모든 유대교인들이 들먹이던 정통성 논란을 한번에 잠재운다.

가이사랴는 초대교회 이후에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에도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모였던 곳으로 오리겐도 여기서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으며, 오리겐의 제자였던 기독교 역사가 요세푸스도 이곳에서 기독교 역사를 저술하였다. 가이사랴는 비잔틴 시대에 번성하지만, 주후 640년경 이슬람세력에게 점령당했다가, 십자군시대에 다시 중요한 거점 도시로 등장하게 된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고 다시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간 후에 이슬람 세력이 십자군의 재 침입을 막기 위해 성채를 아예 모래에 파묻어 버렸다. 현재도 발굴 작업이 계속 진행하고 있다. 현재 가이사랴 성채 유적은 1251-1252년 십자군에 의하여 건설된 것이다.

가이사랴 유적지는 1947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로마의 신전.원형극장.전차 경기장 등을 비롯하여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멸망해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이 티투스 장군에게 짓밟혔을 때 가이사라는 보존되었는데, 가이사랴가 작은 로마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유적들 가운데 야외 원형극장은 2,000년의 세월이 홀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콘서트 무대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다. 3,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에다 마이크나 스피커 같은 음향장비 없이도 무대에서 내는 소리가 관람석 제일 위 끝자리 까지 선명하게 전달되도록 설계되어 있어 더욱 놀랍다. 그리고 이곳에는 식수원이 없기 때문에 30-40km의 거리에 있는 갈멜산 기슭과 악어 강까지 수로를 건설해서 물을 끝어다가 사용했는데, 지금도 그 수로유적을 볼 수 있다. 전차 경기장 입구에는 공중화장실 유적이 남아 있었다. 2000년 전에 좌변기에 앉아서 용변을 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좌변기 옆으로 홈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하여 그 물로 뒤처리를 하게 했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수동식 비데' 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갈다.

3. 성경의 역사적 자취

1) 빌립이 복음을 전했던 곳(행8장40절)이며 빌립 집사의 집이 있음(행21;8)

2) 사도 바울이 감혔던 감옥 (행25장23절:재판받는 바울)

바울이 3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와 가이사랴에 있는 빌립 집사의 집에 머물 때, 아가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고 말한다. 바울과 동행하던 사람들과 가이사랴 성도들은 바올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권하나,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라고 대답한다.

그 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히며, 유대인들이 매복하여 있다가 바울을 죽이려 했지만 천부장이 이를 알고 호위부대를 만들어 바울을 가이사라로 호송하고,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헤롯 궁에 가두었다. 바올은 헤롯 궁에서 벨릭스 총독의 후임인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구원받은 것과 자신이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사도가 된 것을 자세히 증거한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행 26:29)라고 외친 곳이 바로 이 헤롯 궁 안이었다.

3) 고넬료가 구원받았던 땅 (행10장43-44절)

가이사랴는 바울의 이야기 외에도 고넬료가 욥바에 있던 베드로를 청해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곳으로,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진 소중한 장소이기도 하다. 사도행전 10장 43~44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는 이야기를 할 때 말씀을 듣던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왔다. 이 역사가 바로 가이사라에서 있었다.

4. 성경적 의미

가이사랴는 헤롯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 지었고 이 땅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박해의 땅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곳에 빌립과 베드로와 바올을 통하여 끊임 없이 복음을 전하고 이 땅을 하나님의 복음의 전초기지로 삼으셨다. 그리하여 가이사랴는 빌립이 복음을 전하고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에게 최초로 전도하고 바울을 통하여 복음의 전초기지로서 삼으셨다. 특별히 사도바울의 전도의 열정은 이 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것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이 증거된 기반을 마련한 도시이다. 특히 이후에 오리겐이나 요세푸스를 통하여 기독교에 대한 기반이 조성되기도 했다.